대한제국의 군인이자 관료로 국비장학생으로 일본을 다녀온 뒤 명성황후 시해에 앞잡이가 된 친일파 구연수 입니다.
구연수는 일본 자객들을 민비에게 안내했고 이후 시신에 석유를 뿌려 태운 악질 친일파입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연금을 받고 지내다 한일 합방과 함께 조선에 돌아와 경찰 관료로 평생을 호의호식했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구연수 후손들도 광복 이후 국가의 녹록을 받으며 호의호식 했다는 사실입니다.
창씨개명까지 한 구보 쥬타로 (한국명 구연수)입니다.
|
| 구연수 프로필·을미사변 명성왕후 시신에 석유를 뿌린 친일파 후손은 장관... |
친일파 구연수
1866년 10월 8일 한성부에서 태어나 1883년 4월 무과에 급제하면서 박영효 등 개화파 인사들과 친분을 쌓았습니다.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1884년 4월 도쿄센슈보통중학교 중학과에 입학했고 1886년 4월 졸업했습니다.
같은 해 7월 도쿄제국대학 공예학부 채광급야금학과에 입학해 1892년 8월 졸업했으며, 재학 중에 아키타현에 있던 사도광산 학교에도 입학해 1892년 4월 박창규, 박치운 등과 함께 제1회 졸업생으로 졸업했습니다. 1892년 10월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11월 광무국 주사로 임명됐고, 1894년 6월 공무아문 주사, 1895년 4월 농상공부 광산국 기사를 지냈습니다.
구연수 을미사변 명성왕후 시신에 기름을 부어 태우다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이 벌어질 당시 훈련대 제2대대 소속으로 제2대대장 우범선의 부하로 일본인 낭인들의 궁궐 진입을 안내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사건 당일 살해된 명성황후의 시신에 석유를 뿌려 불태우는 작업을 감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노시향토박물관에 소장된 <스기무라군 일기>에 따르면 우범선이 구연수와 하사관에게 명해 왕비의 시체를 이불로 감싸 옆 창고에 옮긴 뒤 동산 기슭에서 석유를 끼얹어 태웠고, 타다 남은 뼈는 하사관이 연못에 버렸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사건직후 일본에 망명했고 한국인들의 생계비 지급을 위해 일본 외무성은 1만원을 책정해 지원했는데 시해사건 전후의 망명자를 포함해 유길준 장전 조의연 권영진등에게는 월35엔, 우범선 황철 구연수 이두황 등에겐 월25엔씩 지급했습니다.
(※ 기록에 따르면 당시 초등학교 교사 초임이 8~10엔 정도로 25엔이면 교사 월급의 3배에 달하는 큰 돈입니다.)
1937년 3월호 <야담>에 따르면 일본인 검객 48명과 조선인 구연수 외에 명성황후의 얼굴을 알고 있던 일본인 여성이 궁중 진입을 수행했다는 내용이 실리기도 했지만 당시 일제 검열로 삭제됐습니다. 구연수는 로닌(낭인)들에게 명성황후를 직접 지목해주는 역할도 했다고 <우범선 최후사>를 근거로 한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
한 마디로 요약하면 ...
국비 장학생으로 일본 유학을 다녀온 이후 당시 궁궐에서 근무하면서 명성왕후 민비의 얼굴을 알고 있는 경호원이 사실상 일본과 내통한 간첩이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이후 명성왕후의 시체를 처리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연금을 받고 살다가 다시 돌아온 충격적인 친일파입니다.
|
| 구연수 을미사변 명성왕후 시해 사건 |
구연수 명성왕후 시해 이후는?
사건 이후 주범인 이두황, 우범선 등과 함께 체포령을 피해 일본으로 피신했습니다. 처음에는 히로시마와 교토로 도피했다가, 살해 사건의 주범인 미우라 고로 등이 석방되어 귀국하자 도쿄로 이동해 일본 정부의 비호 아래 연금을 받으면서 망명 생활을 했습니다.
1896년 4월 일본 정부에 광산 기사로 고용됐고, 1899년 5월경 잠시 부산항에 들어와 국내에 있는 친일 일본 동조 세력과 접촉을 시도했지만 8월 말경 일본 측의 권고로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1904년 4월 중순 고종은 주한일본국공사관에 구연수를 포함한 정치적 난민 신청자 14명을 일본에서 추방할 것을 요청했으나 일본 정부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 통감부가 설치되고 1906년 순종 즉위로 특사가 단행되면서 구연수를 포함한 을미사변 관련자들이 사면됐습니다. 1907년 5월 귀국해 일진회 평의원이 됐고, 6월에는 울도군수로 임명되기도 했는데 실제 부임하지는 않았습니다.
같은 해 7월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이토 히로부미의 사주를 받은 송병준의 지시로 일진회 회원 300여 명을 동원해 왕궁을 포위하고 시위를 벌여 고종을 협박해 퇴위시키는 데 앞장섰고, 이 공로로 경무사에 발탁됐습니다. 한 마디로 고종 퇴위의 1등 공신으로 장관까지 한 친일파입니다.
(※ 조선 말기 경찰·감옥업무를 관장한 경무청(警務廳)의 장관직입니다.)
퇴위 직후 이완용의 집을 불태우는 등 항일 시위가 잇따르자 철시를 주도했던 상업회의소 회장 조병택을 체포하는 등 진압에 적극 나섰고, 일반인의 경거망동을 경고하는 고시문을 한성부 각처에 내걸기도 했습니다.
1907년 8월 한일경무합동 성립 이후 경시청 경시부감이 됐고, 1910년 6월 통감부 경무관이 됐습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의 유일한 조선인 경무관으로 임명됐고, 1918년 경무국 신설 이후 칙임 사무관을 지냈으며, 1923년 4월 퇴직 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에 임명됐습니다.
1916년 12월 잡지 『조선과 만주』 제113호에 「부랑선인의 구제책」이라는 글을 게재해 조혼제도와 무위도식하는 생활태도를 비판하면서, 국내 부랑자가 양산되는 근본 원인이 일본 제국의 책임이 아니라 조선인들의 무지, 무자각, 태만, 구습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같은 잡지에 실린 「남대문의 제거에 반대했던 장군」이라는 글에서는 새로 부임하는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를 호평했습니다.
1919년 9월 강우규 의사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투척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매일신보』 9월 11일자 기사에서 "결코 조선인 절대 다수의 의사가 아닌 불량배의 우거로서 통탄불이한다"는 발언을 게재해 강우규 의사를 비난했습니다.
1925년 5월 6일 중추원 참의로 재직 중 향년 58세로 사망했습니다. 이후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포함된 친일파 중에서도 친일 행적이 남다른 인물입니다. 친일 행적으로 일본에서 훈장인 1920년 7월 훈2등 서보장까지 받았습니다.
구연수 후손 한국은행 초대총재 구용서
배우자는 은진 송씨로, 친일파 송병준의 딸이며 아들 구용서는 훗날 한국은행 초대 총재를 지냈습니다. 1925년 5월 9일자 <조선총독부관보>에 구연수 사망 사흘 뒤 유족에게 연수당 3천 원이 지급됐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922년 기준 21세이던 경성일보사 직공 연봉이 204원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일제는 그보다 약 15배에 달하는 액수를 구연수 유족에게 지급했습니다.
창씨개명까지한 구용서는 1899년 태어나 1925년부터 조선은행에서 근무했는데 1942년에 조선인 최초로 조선은행 지점장이 됐습니다. 8 15 광복 이후 이승만 정부 하에서 초대 한국은행 총재, 제4대 대한석탄공사 총재, 초대 한국제지공업인 연합회 회장, 초대 한국산업은행 총재, 제 10대 상공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친일파 구연수 후손으로 승승장구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
| 친일파 구연수 후손 구용서 한국은행 총재 |
구연수 안상호
2023년 9월 일요신문i 보도에 따르면 배우 하영 증조부 안상호가 일본인 여성 가와구치 이소코와 결혼할 때 구연수가 소개했다는 것이 기사로 알려지면서 친일행적이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2007년 한국민족운동사연구 학회지 논문에 따르면 안상호는 일본 도쿄의 의친왕 이강 저택을 드나들던 중 그곳에서 사무를 보던 가와구치 이소코를 알게 됐고, 이 과정에서 일본으로 망명 중이던 구연수가 두 사람을 소개했으며 이후 결혼으로 이어졌습니다.
|
| 배우 하영 증조부 안상호 친일파 구연수 |
구연수 약력
- 1866년 - 한성부 출생
- 1883년 - 무과 급제
- 1884년 - 도쿄센슈보통중학교 중학과 입학
- 1886년 - 도쿄센슈보통중학교 졸업, 도쿄제국대학 공예학부 채광급야금학과 입학
- 1892년 - 아키타현 사도광산 학교 졸업, 도쿄제국대학 졸업, 귀국, 광무국 주사 임명
- 1894년 - 공무아문 주사
- 1895년 - 농상공부 광산국 기사, 을미사변 가담 및 일본 피신
- 1896년 - 일본 정부 광산 기사로 고용
- 1899년 - 부산항 잠입 및 국내 세력 접촉 시도
- 1904년 - 고종의 일본 추방 요청 대상에 포함
- 1906년 - 사면
- 1907년 - 귀국, 일진회 평의원, 울도군수 임명(미부임), 고종 퇴위 가담, 경무사 발탁, 경시청 경시부감
- 1908년 - 강구회 간사 참여
- 1910년 - 통감부 경무관,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경무관
- 1912년 - 한국병합기념장 수령
- 1915년 -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 평의원, 다이쇼 덴노 즉위식 참석, 대례기념장 수령
- 1916년 - 「부랑선인의 구제책」 등 기고
- 1918년 - 조선국세조사평의회 평의원, 경무국 칙임 사무관
- 1919년 - 강우규 의사 비난 인터뷰 게재
- 1920년 - 훈2등 서보장 수령
- 1923년 - 경무국 사무관 퇴직,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임명
- 1925년 - 사망(향년 58세)
구연수 수상 이력
- 1912년 - 한국병합기념장
- 1915년 - 다이쇼 덴노 즉위기념 대례기념장
- 1920년 - 훈2등 서보장
을미사변 구연수 프로필
- 한자 구연수(具然壽) / 창씨명 구보 쥬타로(久保壽太郞)
- 생년월일 1866년 10월 8일
- 사망일 1925년 5월 6일 (사망 당시 58세)
- 고향 한성부(現 서울특별시) / 국적 조선, 대한제국
- 본관 창원 구씨 / 자 성보(誠甫)
- 학력 도쿄센슈보통중학교 졸업, 도쿄제국대학 공예학부 채광급야금학과 졸업, 아키타현 사도광산 학교 졸업
- 가족 부인 (아내) 은진 송씨(송병준의 딸), 아들 구용서(한국은행 초대 총재)
- 경력 광무국 주사, 공무아문 주사, 농상공부 광산국 기사, 경시청 경시부감, 한국통감부 경무관, 조선총독부 경무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 비고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댓글 없음
아래의 댓글 입력을 클릭한 후 익명으로 댓글을 달아 주셔도 됩니다. 글 내용에 관한 질문도 환영합니다. 모든 댓글은 관리자의 승인을 받아야 보여집니다. 댓글을 달고 기다려 주세요.



